창조과학

제1장 과학ㆍ기원과학ㆍ창조과학

오직 예수 2007. 4. 2. 13:17
 

                                             

                                      창조과학과 기원


제 1 장. 과학ㆍ기원과학ㆍ창조과학


1. 과학

 1.1 과학의 정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흔히 과학만능시대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많은 분야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 시대라고도 한다.

    과학은 물질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과학에서 연구란 자연현상을 관찰

  하여 새로운 현상이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과학적 대상은 관측이 가능하고 실

  험이 가능해야 한다.

    과학문명은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켜 행동이나 생활패턴을 변화시킨다. 긍정적인 측면으

  로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꽃피어 온 문화 속에서 전례 없는 긍정적인 혜택을 누리며 살게

  되었지만, 부정적 측면은 통제권을 벗어나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위협에 구체적 대안도 마

  련하지 못한 채 노출되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핵무기의 생산과 생명체의 복제

  또는 자연환경의 파괴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1.2 과학적 방법

  

    과학이론은 항상 인과율1)과 재연성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절차가 필요한데

  이때 이용되는 절차가 소위 과학적 방법이다.

                            

    ㆍ 과학적 방법은 일반적으로 다섯 단계로 구성된다.

  ☞  1)관측 - 2)문제제기(의문) - 3)가정 - 4)이론 - 5)실험 및 증명 - 6) 사실이나 법칙

   ㆍ 과학은 우주의 물체나 자연현상 또는 생명현상을 관찰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ㆍ 실험을 통하여 증명되기 전에는 그럴듯한 이론일지라도  단순히 이론일 뿐 과학적 사실

       이거나 법칙이 될 수 없는 것이 과학세계이다.

  ☞ 원자탄의 폭발 결과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원자탄 투하에 대한 도덕적 판단

     이나 선악의 판단은 과학적 방법으로 어찌할 수가 없다. 과학적 방법으로는 우주 만물과 그

     운행 질서(법칙)를 창조하신 영적 존재인 창조주(God)를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것

     이다.


  ☞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1946년에 채택하였던 건강의 정의를 1998년도에 개정하면서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나 불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및 영적으로 완전

   히 안정된 역동적인 상태이다(Health is a dynamic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social and not merely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라고 하여 영적인 상태를 추구하

   기도 하였다.


2. 기원논쟁과 기원과학

     기원문제는 시작되는 과정을 아무도 관찰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의 첫 단계인

  찰과 측정이 불가능한 현상이다.

    기원설들을 크게 분류하면 진화모델과 창조모델이 있다. 이 두 모델은 둘 다 실험으로 사실 여

  부를 가릴 수도 없기 때문에 두 모델의 충돌은 피할 길이 없다. 진화모델은 수십억 년을 단위로

  하는 오랜 시간 동안 모든 것이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인 반면 창조모델은 초자연적인 지혜와 설계에 의하여 종류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

  졌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진화모델은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종외 진화 즉, 대진화(macroevolution)가 지

  속되어 왔다고 보아 생명체들은 공통의 조상이 있다는 것이고, 창조모델은 같은 종 내에서의

  작고 큰 변화인 종내 진화 즉, 소진화(microrevolution)는 가능하되 대진화는 불가능하다는 것

  이다. 쉽게 말해서 진화모델은 모든 생명체가 공통조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며, 창조모

  델은 각 종의 기원은 독립적이며 서로 무관 하다고 본다.

ㆍ 과학적 자료를 고찰하면서 과학적 논리와 법칙에 비추어 어느 모델이 더 타당성이 있는지를

    가늠 할 수가 있다.

ㆍ 생명의 기원이 진화한 것인가, 아니면 창조에 의한 것인가를 판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

    학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ㆍ 생명체의 자연발생 가능성의 확률적 검증과 열역학적 고찰, 생물학적 고찰, 지질학적 고찰, 화

    학적 고찰과 오묘한 생명현상과 그 질서에 대하여 음미해 보면 현재의 모등 것이 진화의 산물 

    인지 지적 존재의 개입에 의한 창조의 산물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ㆍ 창조론(creationism)은 창조주(하나님)가 그의 지혜와 설계대로 의도적으로 사람을 포함한 모

    든 생명체들을 그 종류대로 만들었다는 견해로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환경에 적응하며 종

    내에서만 변화하는 소진화(microrevolution)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ㆍ 현실적으로 진화론의 영향은 단순한 기원에 관한 학문적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해

    악성이 너무 커서 인종우생학(eugenics)이 등장하고 인종차별적 정책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국수주의와 제국주의의 형성,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등장 등 사회적 영향을 주는 한편 생명기계

    론적인 사고방식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시켜 왔으며 복음을 파괴하여 왔다.

  ☞ 참고 << 생명탄생은 2법칙 위반인가?  Page 4-7 >>


3. 창조과학의 정의와 논쟁

    과학은 과학, 종교는 종교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토록 현대인들이 과학의 정체성을 외치기 이

  현대과학의 토대를 놓은 선각자들은 종교와 과학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와 과학이

  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ㆍ근세의 과학자들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 갈릴레이(Galileo Gallei,

   1564-1642), 데카르트(Renne Decartes, 1596-1650) 등은 “자연을 공부하는 것은 자연을 창

  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솜씨를 자연이라는 책에서 읽는다.”라고도 하였다.

ㆍ 물리학자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종교와 과학은 충돌하지 않으며, 이성은 종교

  의 적이 아닌 벗”이라고 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고 하는 ‘창조’란 말의 원어(히브리

  어)적 의미는 하나님이 ‘하신’ 일,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천지를 ‘지으신’ 것을 의미

  다. 원어로 ‘바라(barah)'라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엘로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만 사용하

  는 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 설계하신 모든 것들을 말씀으로 명하여 만드셨다. 그

  리고 만들어진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4, 10, 12, 18, 21, 25, 31)” 라고

  하셨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부합하였고 모순이나 갈

  등이 전혀 없는 완벽한 상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종류가 부족한 부분이 많아 더 나은

  다른 종류로 진화할 필요는 더욱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창조의 과정은 합리적인 순서에 따라 계획적으로 창조되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

  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3)” 아무도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지켜 본적이 없다. 그리고 창조과정을 반복하여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도 없다.

    창조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특별계시이다. 우리는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을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로마서 1:20)이 그 증거이다.

                                                

     창조과학은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과학적 사실과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성경의 해석에 도움을 주고, 복음증

  거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참고 << "노아의 大홍수는 실제"…흑해 해저서 7500년 전 집 발견 Page 8-11 >>

 

 


<< 생명탄생은 2법칙 위반인가? >>

  자연적인 변화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제2법칙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보면 놀라운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지만 변화는 계속되기 때문에 결국은 엔트로피가 더 이상 증가할 수 없는 극도의 혼란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의 자연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열죽음이라고 부르는 우주의 종말이다. 그리고 보면 제2법칙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종말을 향해서 무거운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는 암울한 예언 같다. 그러나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의 출현은 열역학으로 볼 때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생명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분자가 정확하게 배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생명체의 탄생은 제2법칙에 위배되는 현상이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자연으로 흩어져버리는 죽음이 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제2법칙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제2법칙은 모든 것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평형상태에만 적용되는 것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어서 고전적인 열역학이 적용되는 평형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평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경우에는 그 특성이 평형상태와 아주 달라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 우주에 흩어져 있는 엔트로피가 다시 감소하면서 뜻밖의 질서가 나타날 수가 있다는 얘기다. 1977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일리야 프리고진이 밝혀낸 무산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일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평형상태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에너지가 옮겨 다니면서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고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자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우주의 무질서가 흩어져 사라지면서 엔트로피가 오히려 감소하고 그 결과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일시적인 혼돈인 카오스다. 결국 현대의 열역학은 우리의 우주는 혼돈의 상태를 거치면서 새로운 질서, 즉 생명을 탄생시키면서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라는 밝은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너무 짧아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채기도 쉽지 않고 과연 그러한지 판단해보기도 어렵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해하고 판단해 보기 위해서는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글은 중요한 점을 착각 또는 혼동하고 있다. 그럼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열역학 법칙들

  열역학은 평형상태를 다룬다. 이 말은 열역학이 평형에 주로 관심을 둔다는 뜻이지 비평형상태에서는 열역학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열역학 제 1 법칙은 에너지 보존 법칙인데 비평형상태에서는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또 제 2 법칙의 한 형태는 '열은 온도가 낮은 쪽에서 온도가 높은 쪽으로 저절로 흘러가지 않는다'(Clausius)는 것인데 비평형상태에서라고 해서 온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열이 저절로 흘러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에어컨이나 냉장고를 예로 들려고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경우들에는 전기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경우들에서 제 2 법칙이 성립됨은 잘 알려져 있다.) 열역학 법칙들은 비평형상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즈음에서 '열역학은 평형상태를 다룬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화학 반응을 예로 들자면, 두 용액을 섞어서 반응을 시킬 경우 열역학은 반응이 평형에 도달했을 때 어떤 상태가 될지 예측할 수는 있지만 얼마나 빨리 평형에 도달할지는 알 수 없다. 즉 평형에 도달하기 전의 상태(당연히 비평형상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열역학은 평형과 관계가 없는 개념(예컨대 반응 속도)은 다루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일부 열역학적 양들은 비평형 상태에서는 정의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열역학 법칙들이 비평형상태에 대해서는 아무 제한도 가하지 않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계(system)는 비평형상태에서도 나중에 평형에 도달하였을 때의 결과가 열역학 법칙을 따르도록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비평형상태도 열역학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동아에 실린 글이 마치 비평형상태에서는 계가 제 2 법칙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되어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프리고진의 업적도 비평형상태에서 제 2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은 절대로 아니다.


엔트로피

  특히 제 2 법칙, 즉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이 비평형상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엔트로피는 평형상태가 유지되거나 연속적인 평형상태를 통해 변할 때(reversible process)에는 변하지 않으며 오직 비평형상태를 통과할 때(irreversible process)에만 증가하기 때문이다. 비평형상태야말로 엔트로피 증가의 원천인 것이다. 단연코 엔트로피는 감소하지 않는다. 국부적으로 엔트로피가 감소할 수 있으나 더 큰 주변부의 엔트로피 증가가 동반될 수밖에 없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언제나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없다.

  자, 여기서 중요하고도 몹시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만 하겠다. 엔트로피란 무엇인가? 엔트로피는 온도와 같은 열역학적 양들과는 달리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몹시 어렵다. (내 생각에는 '직관적' 이해는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에 수식으로 된 엔트로피의 정의를 쓰는 것은 전혀 쓸 데 없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거의 아무런 직관적인 생각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가 온도와 열량같은 것을 통하여 정의된다는 점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엔트로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널리 알려져 있는 한 견해가 있다. 이것은 계의 엔트로피란 것이 그 계의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볼쯔만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확률적인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그 자세한 것은 다룰 필요가 없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볼쯔만의 견해, 즉 '볼쯔만의 질서원리'는 열역학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엔트로피란 무엇인가'에 대한 볼쯔만의 답이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여기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는 증가한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은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엔트로피는 증가한다'와 '엔트로피는 무질서도이다'가 그것이다. 여기서 전자가 열역학 제 2 법칙이며 후자는 볼쯔만의 질서원리이다.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열역학적인 표현이지만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꼭 그렇지는 않다. 과학동아의 글은 이 둘을 구분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무산구조

  여기서는 일리야 프리고진의 업적을 소개해야 할텐데 먼저 필자의 무식함을 고백해야 겠다. 나는 프리고진의 업적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대략적인 윤곽만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이제 쓸 내용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볼쯔만의 질서원리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많은 경우에 적용될 수 있었고 열역학과도 잘 조화되는 것 같았다. 그 성공을 보여주듯 볼쯔만의 묘비에는 질서원리를 나타내는 유명한 수식이 적혀있다고 한다. 엔트로피는 진실로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져왔다.

  그러나 프리고진은 질서원리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열역학의 세 단계를 말하는데 평형상태, 평형에 가까운 상태,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가 그것이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평형상태와 평형에 가까운 상태에서는 질서원리가 대체로 옳지만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 질서원리의 성공은 열역학이 주로 평형상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는 엔트로피의 증가가 오히려 질서를 생성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무산 구조(dissipative structure)가 그것으로서 dissipative란 말은 엔트로피가 증가함을 내타내 주고 있다.

  대류 현상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열한다고 해 보자. 이 경우 엔트로피는 물론 증가한다. 그러나 주전자 속의 물은 대류하기 시작하는데 즉 물분자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가열하기 전에는 물분자들이 온갖 방향으로 움직였을 텐데 대류가 일어남으로써 물분자들은 더욱 질서있게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프리고진은 일련의 더 복잡한 예들을 들고 있다.

  과학동아의 글로 되돌아가자. 그 글은 엔트로피가 무질서도임을 은연중에 가정하고 질서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엔트로피가 감소할 수 있다고 해석해 버렸다. 프리고진은 제 2 법칙을 수호하고 질서원리를 공격하였는데 과학동아의 글은 그것을 반대로 해버리고 말았다.


생명의 기원

 사실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생명탄생은 제 2 법칙 위반인가? 전통적으로 창조론자들은 자발적인 생명탄생은 제 2 법칙 위반이고 따라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프리고진은 엔트로피가 반드시 무질서도를 의미하지는 않으므로 생명탄생이 제 2 법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프리고진에 견해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반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전적으로 필자의 무지의 소치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생명이 자발적으로 발생하려면, 위에서 한 얘기들에 따르면, 그것은 무산 구조에만 의존하여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얘기했듯이 무산 구조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고 다시 평형으로 돌아가게 되면 질서원리가 다시 타당해지므로 무산 구조가 만들어지기 전보다 더 무질서하게 된다. 따라서 생명발생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화학에서 무산 구조의 예로 가장 많이 얘기되는 것은 진동 반응(oscillating reaction)이고 그 가장 대표적인 예는 Belousov-Zhabotinsky반응이다. 이 반응은 용액의 색깔이 주기적으로 변하는 특징이 있다. 나는 화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BZ반응을 평범한 시험관에서 실험해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색깔이 두세 번 변하고는 평형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 반응을 실제로 연구할 때에는 평형에 도달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여러 장치가 반응용기에 붙어있다. 계속해서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지속적으로 평형에서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 있는가? 있다. 바로 생명이 그것이다. 평형이란 생명체에게 곧 죽음을 뜻한다. 생명체의 수많은, 그리고 매우 정교한 조직들이 자신의 몸을 평형으로부터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평형에서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우 정교하고 잘 짜여진 조건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단지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질서있는 구조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특히 생명이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잘 짜여진 구조가 생기기 위해서는 참으로 상상하기도 어려운 조건들이 필요할 것이다. 우연에 의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그야말로 무지하게 작을 것이다. 잘라 말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산 구조는 '생명발생은 제 2 법칙 위반이다'라는 논증의 구조를 허물었으나 생명탄생 자체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창조론자들이 제 2 법칙을 거명해서 생명발생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열역학 법칙들이 잘 정립되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어떤 열역학적인 추론으로 도출 되었다기보다는 확률론적인 추론이 질서원리와 맞물려 열역학 법칙과 연결된 것에 불과하다. 즉 애초에 이것은 확률의 문제이지 열역학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에필로그

  << 모든 돼지는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돼지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

  이 논증은 잘못된 추론으로부터 옳은 결론을 이끌어낸 예이다. 몹시 우스꽝스럽게 보일 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추론을 한 사람은 특이한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돼지'라고 말할 때 사실은 '인간'을 의미하였을지도 모른다. 또는 인간과 돼지를 같은 종류로 보고 (사실 돼지의 내장은 인간의 내장과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그것을 한데 묶어 '돼지'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리스인을 매우 싫어하는 민족으로서 그에게 '돼지'란 곧 '그리스인'을 의미하였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소크라테스가 죽을 운명을 가진 어떤 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의 잘못된, 또는 정확하지 않은 추론은 그의 결론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기는 하나, 그의 결론은 그가 올바로 간파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추론의 잘못을 바로잡고 정확하지 않은 부분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간파한 사실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발생의 불가능성에 대한, 기존의 제 2 법칙에 따른 논증은 다소 잘못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경우 '엔트로피'라는 말이 마치 '돼지'라는 말처럼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논증을 다듬고 빼야 할 것은 빼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역학 제 2 법칙을 사용하여 논증을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소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식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논증에서 열역학 제 2 법칙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다만 불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열역학 제 2 법칙을 언급하는 것은 효과적일 수도 있다.

  요컨대 소크라테스가 돼지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올바른 추론이 된다. (추론의 올바름과 결론의 올바름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가 돼지이건 아니건 간에, 결국 죽었다.

출처 : 창조지

URL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amazement/a3/a31/a31o8.htm


 

기사 분야 :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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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일자 : 2000/09/14(목) 00:13


"노아의 大홍수는 실제"…흑해 해저서 7500년 전 집 발견


  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대홍수를 인류가 겪었음을 알려주는 7500여년 전의 오래된 가옥이 흑해의 바닥에서 발견됐다고 13일 LA타임스가 전했다.

이 신문은 침몰된 타이타닉호를 발견했던 해저탐험가 로버트 밸러드의 탐사팀이 터키 연안에서 19㎞ 떨어진 수심 900m의 바닷속에서 인류가 거주한 흔적을 찾아냈다고 전했다. 밸러드는 “이번 발견은 유럽 고대문명사를 다시 쓰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탐사팀의 일원인 고고학자 프레드릭 히버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이번 탐사를 ‘흑해 프로젝트’라고 소개하며 “이번 발견은 대홍수 이전 흑해 연안에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최초의 구체적 증거”라고 말했다.

탐사팀은 음파탐지기가 탑재된 원격조종 잠수정을 이용했으며 수심 약 900m 지점에서 세로 11.7m, 가로 3.9m의 직육각형 형태로 잘 다듬어진 모양의 헛간을 발견했다. 또한 통나무 조각, 잘 닦인 돌 뭉치와 잡동사니 무더기 등 사람이 거주한 흔적을 보여주는 다른 도구들도 발견했다.

흑해에 대한 관심은 컬럼비아대의 고고학자인 윌리엄 라이언 등이 1997년 공동으로 펴낸 책 ‘노아의 홍수’에서 7000여년 전 유럽의 빙하가 녹으면서 조그마한 호수로 흘러들어 흑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 뒤 본격적으로 높아졌다.

      

 밸러드는 “지난해에는 흑해 바닷속의 고대 해안선에서 7000여년 된 민물조개와 바다조개 껍데기를 동시에 발견했다”며 “이는 7000여년 전 흑해가 민물에서 바닷물로 바뀐 갑작스럽고 거대한 사건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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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과학의 만남] 노아홍수 (中) /  [국민일보 2005-05-13 15:07] 

                 

“…모든 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창 7:14∼15)


도대체 방주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기에 이렇게 많은 동물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동물이 들어갈 만큼 컸던 방주의 안정성은 확보돼 있었다는 말인가? 노아홍수를 부정하는 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부분에 대해 회의적이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방주는 길이 300규빗, 너비 50규빗, 높이 30규빗(창 6:15) 규모로 제작됐다. 규빗은 당시 도량형 단위였다. 1규빗(큐빗·cubit)을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18인치 정도에 해당한다. 아무튼 성서에 소개되고 있는 1규빗은 45㎝보다 길었을 것이란 게 일반적인 견해다. 따라서 1규빗을 최소한 45㎝로 계산하더라도 방주의 크기는 길이 135m,너비 22.5m,높이 13.5m에 해당한다. 축구장의 길이(국제규격)가 100∼114m임을 감안하면 방주는 그것보다 더 길게 제작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의 넓이를 계산하면 4만1006.25㎥로 화물 운반용 기차 522량에 해당한다.


방주의 특징은 배가 아니라는 데 있다. 범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돛은 물론 노와 키 등 추진 수단이 전혀 없었다. 창조과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주는 순전히 화물을 싣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방주를 ‘ark’(상자)로 번역하고 있다(창 8:4?NIV, KJV, NASB).거대한 상자로, 오직 저장 공간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주의 안정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통상 배의 안정성은 그것의 구조비율에 의해 결정되는데 파도에 의해 배가 부서지는 정도인 구조 안정성, 배가 기울어졌다가 다시 평형을 이루는 복원 안정성, 배안의 화물들이 안정하게 유지되는 파랑 안정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형선박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퀸엘리자베스 호는 그 비율(길이: 너비)이 8.16대1이며 캔버라 호는 8.2대1이다. 몇몇 대형 유조선들은 대략 7대1에 가깝다. 조선기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속도를 감안, 설계된 것인데 속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6대1의 비율에 가깝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방주의 길이와 폭의 비율은 300대50 즉,6대1에 해당된다.


한국창조과학회가 1993년 한국의 해사 기술연구소에 의뢰, 노아방주의 안정성을 확인한 결과 안정성이 매우 탁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주와 동일한 부피를 가지면서 길이와 너비, 그리고 높이의 비율만 다르게 한 13척의 배를 선정, 안정성을 비교 검토했다. 실험은 13척 모두 50분의 1 축소 모형으로 실시됐다. 그 결과 방주만이 파도의 높이가 43m 이하에서 파랑 안정성과 복원 안정성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방주를 건조한 나무의 두께가 30㎝ 이상이었다면 30m 이상의 파도에도 파손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미국선급협회(ABS)에서는 파도 높이가 40m 이상일 때는 배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바다에서 발생한 가장 큰 파도의 높이는 30m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방주는 최악의 경우에도 놀랄 만큼 안정성이 확보돼 있었다는 결론이다.


이런 크기와 안정성이 확보된 방주에 과연 얼마만큼의 동물들이 들어갔을까? 미국의 분류학자인 어언스트 마이어에 따르면 현존하는 동물의 종류는 포유류 3500종, 양서류와 파충류 5500종, 조류 8600종, 어류 1만8000종, 피막동물 1700종, 극피동물 4700종, 절지동물 81만5000종, 연체동물 8만8000종, 곤충 2만5000종, 강장동물 1만종, 해면동물 5000종, 원생동물 1만5000종 등으로 모두 100만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 94만2400종 이상이 물속에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방주에 수용될 필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포유동물이라 해도 고래나 대부분의 양서류는 물론이고 곤충도 다수가 물속에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방주에 수용된 동물은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에 따라 최대 1만7600종이 방주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을 암수 한 쌍 씩으로 계산하면 3만5200마리가 된다. 방주 용적으로 볼 때 대략 양 12만5280마리 정도가 들어갈 수 있다. 동물 1마리의 부피를 양 1마리로 계산하더라도 이들 동물이 차지한 용적은 겨우 방주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이런 과학적 계산을 하지 않고 추상적 개념으로 성서에 접근, 부정하려는 시도는 ‘과학의 오만’이 아닐 수 없다.


남병곤 기자 nambgon@kmib.co.kr


◇도움말 주신 분 △한국창조과학회 △심영기 교수(인제대 나노공학부) △왕대일 교수(감신대 구약학) △김완모 박사(숭실대 기독교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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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고 자료- 조선일보 책 소개


●문명의 창세기1·2    데이비드 롤 지음   해냄·각 10000원

●신약성서 고고학1·2    잭 피니건 지음   민음사    각 42000, 25500원


성서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인가? 인류 최고의 고전인 신-구약의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했는가 하는 것은 학문적 논란의 대상이다.

성서는 그 내용이 발생한지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 기록됐기 때문에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구약의 경우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은 그 내용을 '신화'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한 고고학은 이 같은 인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성서의 대상이 되는 지역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은 많은 내용이 역사적 사실임을 속속 밝혀주고 있다. '문명의 창세기'(데일비드 롤 지음, 김석희 옮김, 해냄)와 '신약성서 고고학'(잭 피니건 지음, 남대극 옮김, 민음사)은 성서고고학의 최근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책이다. 저자들은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전문가들로 전자는 현장 탐험조사기, 후자는 사전이어서 형식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 풍부한 현장 조사와 치밀한 문헌 검토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지난 95년 '세월의 풍상'을 통해 구약성서 후반부의 기록들이 사실이라고 주장해 충격을 던졌던 롤은 다시 3년 뒤 펴낸 '문명의 창세기'에서 창세기를 비롯한 초기 기록 역시 역사적 사실이라고 역설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대한 오랜 현장조사 끝에 롤이 내린 결론은 놀랄 만하다.

에덴동산은 이란 북서부의 험준한 자그로스 산맥 너머에 있었다. 아담의 후예들은 이곳을 떠나 동남부의 수메르 늪지대로 이주했다. 노아의 대홍수 당시 방주가 상륙한 곳은 쿠르디스탄 지역의 주디

다그산 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뱃사람족은 홍해를 거쳐 이집트 동쪽 사막지역에 도착해 파라오 문명을 건설했다…… 저자는 이 같은 결론을 바탕으로 중동지역 고대사에 대한 야심적인 새로운 연표를 제시하고 있다.

'신약성서 고고학'은 침례자 요한, 예수, 무덤, 십자형등 네 부분으로 나눠 모두 344개의 항목에 대해 치밀한 해설을 가하고 있다. 또 관련 사진과 자료목록, 약어표, 참고문헌 등 연구자를 위한 각종 문건을 모아 놓았다.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에는 '성 요셉 교회', '잉태 고지 교회', '성 가브리엘 교회' 등이 세워져 있다. 저자는 "예수가 양육된 곳에 모든 주민이 이용하는 맑은 샘이 있었다."는 초기 기록과 각 교회들의 우물 자리를 대조, 검토함으로써 예수가 자란 곳을 밝히려 했다. 또 신약시대와 초기 교회 시대의 장의 습관, 십자표의 역사와 실례 등의 검토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 이선민 기자 smlee@chosun.com *)